1960년대 절망만 남아있던 대한민국
"1956년부터 1962년까지 7개년간의 원조는 연평균 5억 달러였다.
경제원조가 2.8억 달러, 군사원조가 2.2억 달러다.
한국경제가 완전히 자립하자면 군사 면을 제외하고도 2.8억 달러와 무역적자 5천만 달러를 합쳐
3.3억 달러를 새로이 벌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렇게 된다 해도 이는 현상유지 하는데 그치는 일이다.
이에 가중되는 연평균 2.88%의 인구 증가, 즉 72만 명의 압력은 어찌할 것인가?
원조를 받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은 기적 이외에 바랄 것이 못 되지 않는가?
위기를 고하는 수많은 국민의 생활고, 해마다 늘어만 가는 식량부족, 30%의 실업률,
이 모두가 시급한 해결의 길을 바라고 있는 데 반해 해결방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북괴의 군사적위협이란 국방에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불나고 주인은 도망가버린 폐가를 인수한 기분이다"
"1962년 국가와 혁명과 나 박정희 저"
무려 실업률 30%!!! 지금의 실업률은 얼마인가? 겨우 3.2%다!!!.
3.2%도 그렇게 일자리가 없다며 아우성을 치고 있지 않은가?
1억달러를 빌릴 신용도 없어서 빌려달라고 호소한 대통령
서부독일을 방문하던 유명한 일화를 소개한다
이들을 방문한 박정희! “우리 열심히 일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합시다.”
광부와 간호사들이 몰려나와 대통령의 옷을 잡고 통곡했다.
광부들은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절을 했다. “한국을 도와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었다.
서독 국회에서도 연설을 했다. .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처럼 한국은 분단이 된채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과 싸워 이기려면 경제를 일으키는 수 밖에 없고 돈을 빌릴 수 밖에 없습니다
빌린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할 줄 모릅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
박정희는 어떻게 해서 일자리창출을 이루었나?
세계인들은 뉴딜 정책이 8백만 일자리를 만들어 낸 것에 대해 두고두고 칭송한다.
하지만 박대통령의 일자리 만들기는 이보다 훨씬 더 기막히다.
앞이 보이지 않던 그 암울하기만 했던 시대에 어떻게 일자리를 폭발적으로 만들어 낼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감탄하고 있다.
첫째 그는 앞장서서 공업고와 공과대학을 만들어 기능공을 대량으로 길러내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이들 기능공들의 친구가 됐다.
기능공들은 국제기능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는 게 소원이었다.
기능올림픽 금메달수상자는 대통령이 직접 환영하며 국가적영웅으로 치하해주었다
매년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했다.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고졸 기술인이 대졸 사원보다 더 많은 봉급을 받던 시절이었다
"대학가야 소용없다, 기술을 배우자는게 유행어였으며
심지어 조직폭력 두목도 사장님이라는 용어를 듣는걸 좋아했다
공과대학과 자연계대학은 꿈의 대학이 되었다
머리좋은 학생은 의사니 판사가 아니라 이과계 전문가로 몰려갔다
지금의 교육도 고용도 이래야 한다.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고 온순한 기능공들이 많으니 공장을 지어 달라 호소했다.
대통령의 약속을 신뢰한 외국기업들이 줄줄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하는 일이라 중간에서 공무원들이 장난질을 하지 못했다.
한국이 조립을 많이 해서 팔면 그만큼의 부품과 소재들을 앉아서 팔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공장을 짓는 것은 외국기업에게 매력이었다. 한국의 일자리는 이렇게 해서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둘째 대규모 공단을 지어 기업인들을 입주시키고
이들 기업들에게 외국에서는 이미 사양화 돼 가는 수많은 제품들에 대한 기술도면을 얻어다 주었다.
그러나 공장에는 외국어로 쓰인 기술자료(예: TDP: Technical Data Package)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서 외국에 나가있는 과학자들를 대거 귀국시켜 기업들의 신기술개발을 지도하게 했다.
생활필수품마저 고갈됐던 당시라 생산만 하면 시장은 블랙홀처럼 한 없이 빨아들였다.
공장을 가진 기업들은 한동안 땅 짚고 헤엄치듯이 돈을 긁어 부자가 됐다.
기업은 날로 번창하고 생산 설비는 더욱 팽창했다.
그만큼 일자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바로 이런 것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과학적인 방법이었다.
박정희는 대기업은 어느 정도 크면 그 주식을 상장하게 하였다
그리고 공공의 이익을 중시하여 30대 기업보다 훨씬 큰 국영기업을 대거 육성했다.
그가 간 지 10년 후에 한국전력이 상장했을 때, 그 시장가치는 나머지 상위 20개 기업을 합친 것보다 컸다. 포항제철도 국영기업으로 만들었다.
제조업 전체와 맞먹는 은행도 사실상 공영화했다. 대기업은 절대 금융업에 손대지 못하게 하였다.
박정희 18년 통치에서 가장 혜택을 많이 본 것은 30대 기업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컸던 공기업과 은행이었다.
박정희의 진정한 위대성은 미래에도 일자리를 만드는 원동력을 키우는 대비를 하였다는 것이다.
주위의 의아심에도 넓은 도로를 건설할 수 있는 땅을 그때에 미리 사두었다.
훗날 땅값이 오르면 넓은 도로를 건설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리고 빠듯한 나라 살림에서도 과학단지를 만들어 냈다.
과학단지야말로 미래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핵심적 원동력이기 때문이었다.
과학기술이 뒷받침되지않으면 영원히 선진국의 경제식민지로 종속되며
과학기술이 뒷받침되는 매판자본은 민족자본으로 탈바꿈하게된다는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어
과학계원로들이 대통령을 만나기 원하면 국무회의 중에도 만나주며
카이스트에 근무하는 과학자의 봉급을 서울대교수보다 3배나 더 주었다
이때는 고급과학자들의 봉급이 대통령보다도 높았다
이렇게 하니 장관들 공무원들이 과학자들을 지금처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70년대에 들어서는 월남패망 주한미군철수압박이라는 안보위기에 처하자
온나라를 반공정신으로 정신무장시키고 상위층의 병역비리를 철저히 감시감독하고
신무기개발에도 기울여 그가 갈 무렵엔 남북한이 1:1로 싸워 볼만 할 군사력까지 확보해두었다
개인의 소득이 20배넘게 증가되었으며 수출액은 200넘게 증가되었다
79년무렵에는 누구나 한집에 자전거 한대씩은 장만할 정도였다
연필깍기도 못만드는 한심한 나라가 78년에는 세계7번째로 미사일을 개발해내며
헐벗은 민둥산이 가득한 나라에서 사람들을 동원해가며 나무심기에 주력한 결과로
금수강산을 되찾게 되었다 세간의 오해와는 반대로 환경보호의 일등공신이다
이 근거로 전국각지에 있는 나무들의 70%는 박정희시절에 심어진 것들이다
서기 2100년쯤에는 미국같은 초강대국에 오른다는 광대한 영토.인구.자원을 소유한 브릭스!
브릭스는 박정희의 일자리창출.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개방정책. 과학기술우대를 따라한것이 비결이다
이제는 북한과 쿠바를 제외한 세계 150개 개발도상국들도 그의 핵심정책을 그대로 따라한다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단점이 없겠는가?
반공정책과 연계된 연좌제로 억울하게 피해본 사람도 적지않았다는건 사실이며
전태일분신사건과 같은 열악한 노동환경이 흔한 풍경이었고
나무심기를 할때 강압적으로하여 원성을 들었고 생존시에도 독재자라는 오명으로
국내외로 욕을 먹었고 말년에는 경호실장의 전횡을 방임한탓에 흉탄에 죽는 비극을 자초하였다
그러나 사생활을 포함한 단점, 그당시 부조리한 일들, 온갖 과오를 다 합쳐도 위인임에는 틀림없고 생각한다
김씨공산왕조가 거꾸려뜨려지고 북한의 절대빈곤과 억압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순간부터
광개토대왕같은 반열에 오르는 지도자로 올라가게 된다는것을 확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