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델리스 Precision DAC(RNDAC)는 프로 오디오계의 전설적 엔지니어 루퍼트 니브의 설계로 제작된 DAC이다. 외관은 기존의 하이파이 DAC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프로 오디오에서나 접할 수 있는 오디오 인터페이스와 닮은 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 Precision DAC를 설명하기 전에 우선. 루퍼트 니브(Rupert Neve)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루퍼트 니브는 프로 오디오나 음악인들 사이에서는 설명이 필요 없는 레전더리 엔지니어로, 스튜디오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는 트랜지스터 콘솔이나 무빙페이더 콘솔이 바로 루퍼트 니브가 개발한 작품이자 유산이다.

그가 만든 이퀄라이저와 컴프레서, 프리앰프, 페이더, 스튜디오 마이크, 믹싱 콘솔은 말 그대로 업계 표준이 되었을 만큼 압도적인 기술을 자랑했으며, 5060 센터피스를 비롯해 포르티코 II(Portico II) 아웃보드, 셸포드(Shelford) 시리즈, 5051 이퀄라이저+컴프레서, 5051 마이크 프리앰프 등 소위 명기들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1073 콘솔 과도 같은 모델은 수많은 회사에서 복각이 이루어질 정도로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제품들을 만들어내었고, 그렇게 많은 업적을 남긴 루퍼트 니브는 음반 산업의 발전과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997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기술 부문 평생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19년 루퍼트 니브 91세에 피델리스 회사를 차리고 오늘 소개하는 홈오디오용 DAC, 헤드폰 앰프 겸 프리 앰프인 Precision DAC와 헤드폰 앰프인 Precision Headphone Amplifier(RNHP), 포노앰프인 Precision Phono Pre-Amplifier(Model 7566)을 출시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루퍼트 니브는 올해 2월 12일 94세의 일기로 타계하셨다. 이 Precision DAC는 그의 유작이 되어버린 것이다.

피델리스 Precision DAC 본격 탐구

그럼 Precision DAC를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Precision DAC는 한마디로 DAC+프리앰프+헤드폰 앰프가 한 몸체에 들어가 있는 제품이다. 우선 외관은 사다리꼴 디자인의 알루미늄 섀시부터 일반 홈오디오에서 보기 힘든 스타일로 루퍼트 니브의 DNA가 그대로 녹아져있다.

전면부를 살펴보면 오른쪽에 있는 강렬한 색의 붉은 볼륨 노브는 그간 루퍼트 니브가 만들어온 기기들에서 볼 수 있는 시그니처 디자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입력 샘플링 레이트를 표시해 주는 LED가 있다. 그 옆에 역시 일반 하이엔드 오디오 디자인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입력 선택 버튼들로 RCA, XLR, 동축, 광, USB 입력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Precision DAC의 또 하나의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는 고품질 헤드폰 앰프가 내장되어 있어서 TRS 언밸런스, XLR 밸런스, 펜타콘 밸런스 등  세 가지의 헤드폰 단자가 이 DAC가 헤드폰 앰프로 사용하더라도 월등한 소리를 들려줄 거라는 기대감이 들게 한다. 그리고 라인 아웃의 온/오프를 선택할 수 있는 스위치, 헤드폰의 하이/로우 게인 선택 스위치가 있다.

후면부는 XLR과 RCA 출력 단자가 1조씩 있으며, 그 옆으로 Fixed와 Variable로 출력을 선택할 수 있는 토글 스위치가 달려 있다. 만일 파워앰프와 직결하여 프리로 사용한다면 이 스위치를 반드시 "Variable"로 해놓아야 한다. RCA 입력과 XLR/TRS 겸용 입력단자가 있으며, 코엑시얼,옵티컬, USB 디지털 입력 단자가 있다. 

USB 단자 옆에는 Dip S/W가 있는데 1번부터 5번까지의 Dip S/W 선택에 따라 음질을 바꿔줄 수 있다.

• 스위치 1 : Slow / Super 롤오프 (PCM)
• 스위치 2 : Standard / Short 그룹 딜레이 (PCM)
• 스위치 3 : Slow / Sharp 롤오프 (PCM)
• 스위치 4 : Non / AKM 하이퀄리티 사운드 모드 (PCM, DSD)
• 스위치 5 : DSD Low / High 필터 폴 (DSD)

헤드폰 앰프부는 인터페이스도 그렇고 출력도 막강하다 할 수 있는데, 출력은 헤드폰 임피던스 16옴, 언밸런스 출력 기준 1000mW에 달하며, 출력 임피던스는 0.01옴, 게인도 하이/로우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밸런스 입력 레벨은 매칭되는 입력 기기에 맞게 +4dBu와 -10dBV 중에 선택하면 되고, RCA 입력은 -10dBV를 기준으로 설계됐지만 최대 +19.2dBV에 달하는 신호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있다. XLR 출력은 디폴트 +4dBu로 설계됐으며 볼륨 조절에 따라 최대 출력 레벨은 +23.5dBu까지 올라간다. 출력 임피던스는 XLR이 40옴, RCA가 30옴이다.

DAC은 AKM의 AK4497 DAC 칩을 써서 PCM은 USB 입력 시 최대 24비트/384kHz까지, DSD는 역시 USB 입력 시 최대 DSD512까지 컨버팅할 수 있다. 설계 면에서는 커스텀 OP 앰프를 통한 모든 증폭과정이 고전압 레일 위에서 퓨어 클래스 A로 이뤄지는 점이 눈길을 끄는데, 이는 전형적인 진공관 앰프 증폭 방식인 것이라는 것이 특이하다.

여기에 밸런스 출력단에 트랜스포머까지 커플링하였는데 1, 2차 권선 사이의 갈바닉 절연(galvanic isolation)을 통해 그라운드 루프와 전자파 노이즈가 차단되는 점에 주목하여 음악에서 노이즈 영향을 최소화한 설계라 할 수 있겠다.

음질평

매칭은 B&W 802 D3에 파라사운드 JC5 파워앰프와 피델리스 Precision DAC를 연결하였다. 소스는 룬 뉴클리어스에 USB로 연결하였다. 첫 음이 나오면서 같이 듣던 사람들이 가벼운 탄성을 지른다. 필자 역시 의외의 음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일반적으로 이 가격대의 DAC들이 깨끗한 배경을 만들어내고 컴팩트한 음상을 만들어내지만 다소 여위고 가는 음에 음끝이 딱딱한 경우가 많은데, Precision DAC를 DAC와 프리앰프로만 쓴 것인데 마치 구동력이 올라간 듯, 스피커 유닛의 구경이 커진 듯 음들이 여유 있고 마치 엉켜있던 실타래가 풀어지듯이 너무도 쉽게 쉽게, Effortless로 음들이 막힘없이 흘러나온다.

루퍼트 니브가 프리앰프 쪽에 엄청난 기술을 갖고 있는 것은 귀동냥으로 알고 있었지만, 직접 접해보고 나니 과연 명불허전이다. 그리고 전해지는 느낌은 정숙함. 이 정도의 가격대의 DAC에서 이런 정숙함을 구현해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음악이 나오는데도 느껴지는 고요함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음악 중간중간의 여백이 분명하게 보이고 그 여백에 고요함이 오롯이 드러난다.

또 하나는 유연함과 음의 두께감이다. 디지털의 고질병이라 할 수 있는 딱딱함이나 경직됨이 없이 막힘이나 주저함도 없이 마치 아날로그처럼 물 흐르는 듯 유연함이 나온다. 그리고 역시 디지털로는 구현해 내기 힘든 음의 두께감이 마치 실연처럼 만들어진다. 이 수준 역시 놀라운 경지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생동감이다. 마치 살아 꿈틀대듯이 음들이 생명력을 갖고 생기를 찾는다. 당연히 음색의 채도도 현란하고 유려하다. 투명하고 맑지만 채도를 잃어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그런 DAC와 분명 차별되는 음질이다. 그리고 발군의 해상력도 극찬 받아야 한다. 트는 음악마다 음들이 부드러웠다, 투명했다, 질감이 좋았다 하며 극적이라 할 만큼 날 것의 느낌 그대로 음을 내준다. 이는 레코딩된 소리를 있는 그대로 다 살려낸다는 의미다. 잭 존슨의 엔젤에서는 한없이 부드러운 숨결과 촉감의 보컬이, 다이아나 크롤 음악에서는 굵고 진한 질감과 꽉 찬 밀도의 다이아나 크롤의 목소리가, 그리고 교향곡에서는 무대 전체의 조망 그리고 피어오름, 고역의 투명함이 마치 300B 앰프처럼 고역을 만들어낸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것은 관악기 소리. 디지털에서 관악기가 어려운 건 다 아실 것이다. 조금만 볼륨을 올려도 관악기 소리가 째지고 가늘어지며 자극적으로 나오기 십상인데, Precision DAC는 디지털이라 믿기 어려운 풍부한 배음에 음끝이 끝없이 뻗어가며 무자극의 실연과 같은 소리를 재현해 내며, 일반 DAC의 가늘고 여린 음에 일격을 가하고 있다 할 정도로 Precision DAC의 관악기 음은 큰 매력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뒷면 Dip S/W를 바꿔가며 미묘하게 변하는 음들로 시스템 매칭과 취향을 맞출 수도 있다.

헤드폰 음질

양질의 헤드폰 앰프가 내장되어 있는 DAC인 만큼 헤드폰도 들어보았다. 단 한 톨의 노이즈도 없이 고요하고 선명함이 스튜디오에서 아티스트의 레코딩에 내가 참관하고 있는 듯한 기분까지 들게 한다. 유연함, 개방감, 질감 등 스피커에서도 느낀 것과 비슷한 음질 특성이 그대로 나온다.

연주 사이사이로 들리는 고독한 적막함을 뚫고 울리는 악기들은 날카롭거나 가늘게 들리지 않고 힘과 여유로 음악적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지나치게 가지런하고 맑기만 한 것이 아니라, 좋은 음악, 말 그대로 아티스트의 의도를 듣는 사람에게 전달하기에 최적화되어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더욱 즐거운 감상을 만들어 준다.

볼륨은 작은 크기에서도 안 들리는 소리나 밸런스가 무너지지 않았고, 볼륨을 높여도 귀에 피로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강렬한 비트가 들어간 팝 음악을 들을 때에도 계속 조금씩 더 볼륨을 키워보게 만든다. 스테레오 분리와 악기들과 목소리의 정돈 역시 인상적이다. 한 곡을 이루는 각각의 악기들이 흩어지듯 분리되는 것이 아닌 각자 있어야 할 곳에 있다. 평소에 듣던 헤드폰 앰프보다 진동은 더 강했고 소리는 맑고 더 많은 음들을 내어주는 느낌으로 한 마디로 깔끔했다.

총평

가끔은 별 기대를 하지 않은 기기가 사람을 놀래킬때가 있다. 피델리스 Precision DAC가 딱 그랬다. 사실 루퍼트 니브는 이름 정도 들어봤지 제품을 직접 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원래 사람이 본인이 직접 경험해 보기 전에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리뷰를 보시는 분들도 무슨 DAC 리뷰에 이런 호들갑을 떨까 할 수 있을 것이다.

피델리스 Precision DAC는 최근에 들어본 DAC 중에서 가장 큰 인상을 남겼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뛰어난 음질을 해주었다. 오디오적 요소가 아니라 음악 그 자체를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힘을 갖고 있다. 거기에 더해 DAC, 헤드폰 앰프, 프리앰프까지 단품 만으로도 발군의 성능을 갖고 있는데, 이 가격대에 하나의 몸체에 담겨져 있다는  것도 매우 큰 장점이라 할 수 있겠다.

가장 큰 단점은 치명적일 수 있는데 리모콘을 지원하지 않아서 볼륨이나 입력 선택을 일일이 수동으로 직접 조작해야 한다. 하지만, 뛰어난 음질은 그 불편함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할 수 있다. 음질과 제품 단가를 위해 리모콘을 넣지 않았다거나, 프로 엔지니어의 특성으로 리모콘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던 부분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분명 Precision DAC은 홈 오디오 애호가들을 위해 루퍼트 니브가 남긴 값진 유산이라 할 수 있겠다. 디지털의 거칠고 야윈 음에 지치신 분이 있다면 피델리스 Precision DAC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기존에 들어왔던 디지털 음이 사실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음이었다는 것을 피델리스 Precision DAC는 알려줄 것이다. 만일 DAC나 프리앰프, 헤드폰 앰프를 찾으시는 분은 이 세 가지 모두를 놀라운 성능과 음질을 제공해 주는 피델리스 Precision DAC를 꼭 한 번 시청 해 보시기 바란다.

한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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